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문단 편집) === 일본의 여론 === 현대 일본인들에게 원폭 투하는 반전(反戰)의 메시지로 받아들여진다. 이 자체는 문제가 없지만 역사적인 관점에 따라서 이러한 역사 인식은 양면성을 띠고 있다. 즉, 그것이 침략 전쟁에 대한 반성으로도 이어지지만 자주 [[일본의 피해자 행세|피해자 인식]]으로도 이어진다. 원폭 희생자를 추모하는 움직임은 순수해야 하며, 그러한 원동력이 역사적 반성의 방향으로 이어지는 것이 중요하다. [[1996년]] 12월, 히로시마 원폭돔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자, [[하시모토 류타로]] 당시 일본 총리는 "'지금까지 전쟁에 관련된 것이 문화유산으로 한번도 등록되지 않았다는데 이미 등록된 것([[아우슈비츠]])이 있는 이상 히로시마가 등록되는 것은 마땅하다"'며 환영의사를 표했다. 당시 미국과 중국 등은 일본의 전쟁 책임 때문에 문화유산 등록에 반대의사를 표해 묘한 신경전이 오가기도 했다.[*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96120700289107011&editNo=6&printCount=1&publishDate=1996-12-07&officeId=00028&pageNo=7&printNo=2746&publishType=00010|일 원폭돔 세계문화유산 지정, 미국 중국 반성없이 피해강조 우려 한겨레]]][*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96120800209110016&editNo=45&printCount=1&publishDate=1996-12-08&officeId=00020&pageNo=10&printNo=23390&publishType=00010|일 원폭돔과 전쟁범죄 동아일보]]] [[1997년]] 미국의 `임계치 이하' 지하핵실험에 대해 3일 2차대전 당시 원폭 피해도시인 일본 히로시마(廣島)와 나가사키(長崎) 시장이 강력하게 항의하고 중국이 우려를 표명했다. 히라오카 다카시 히로시마 시장은 "미국은 (이번 실험 목적이) 핵무기 안전성 확보를 위한 것이라고 하지만 핵무기를 계속 보유하려는 강한 의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봐야한다"면서 "우리는 이같은 실험이 핵무기 개발경쟁을 다시 재연시킬지 모른다는 강한 위기감을 갖고 있다"고 비난했다.이토 잇초 나가사키 시장은 "유감보다 강한 분노를 느낀다"면서 "이번 실험이 핵실험 금지를 위한 국민들의 노력을 무의미하게 만들었다"고 말하고 미국에 강하게 항의할 것을 하시모토 류타로 총리에게 촉구했다. 그러나 정부 대변인인 가지야마 세이로쿠 관방장관은 이에 대한 논평을 거부, 공식적인 입장표명을 하지 않았다. 반핵단체들은 이날 히로시마, 나가사키와 그밖의 다른 주요 도시에서 집회를 갖고 미국의 지하핵실험을 비난했다. 한편 지난 1995, 96년 핵실험으로 국제사회의 비난을 샀던 중국은 이날 우려를 표명했지만 직설적으로 비난하지는 않았다.[* [[https://v.daum.net/v/19970703183800140|日원폭 피해도시 등 반핵단체, 미국 핵실험 강력 항의 1997 연합뉴스]]] 현재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는 일본 내에서 평화의 상징으로 내세워진다. 히로시마의 경우 자신들이 전쟁의 피해자라는 인식이 강해서 '''강한 좌파'''적 성격을 띠고 있다.[* 미국이 잘못해서 다 죽었다는 식의 피해의식이 아니라, 말 그대로 '''일본 군정이 전황을 읽지 못하고 항복을 빨리 결정하지 않은 탓에 애꿎은 우리가 피해를 봤다'''는 의미.] 1999년 히로시마에서는 [[기미가요]](일본 국가) 제창과 [[일장기|히노마루]](일본 국기) 달기를 거부하여 교사와 교장의 충돌 끝에 교장이 [[자살]]한 사례가 있었으며, 나가사키는 시장이 히로히토의 전쟁 책임을 거론한 이후로 히로히토의 분노를 사서 [[극우]] 성향의 [[야쿠자]]들에 의해 2명의 나가사키 시장에 대한 암살 기도가 있었고 그 중 한 명은 끝내 사망했다. 기본적으로 전쟁에 반대하다 보니 전쟁 자체에 대한 반성으로도 이어져 일본의 피해를 입은 주변국에 대한 반성 기류도 그나마 다른 지역보다 뚜렷하다.[* 히로시마에서는 원폭 투하를 이유로 국가지원금을 받고 있기 때문에 타 지역의 일본인들은 이를 '원폭산업'이라고 빈정거리기도 한다.] 그외 히로시마(廣島)와 나가사키(長崎)에 원자폭탄이 떨어진 지 70주년을 맞아 2015년 [[NHK]]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도 '''절반 가까운 일본인이 '지금도 용서할 수 없다'는 인식'''인 것으로 나타났다. NHK가 6월 하순 20세 이상 남녀 1천여명을 상대로 실시해 3일 결과를 공개한 이번 조사에서 '미국이 원폭을 투하한 것에 대해 현재 어떻게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에 ''''지금도 용서할 수 없다'는 답이 49%'''로 집계됐다. 직접 피해지인 히로시마(43%)와 나가사키(46%)에서 집계된 같은 응답의 비율보다 전국 합계치가 높게 나타났다. 반면, '''원폭투하가 '어쩔 수 없었다'는 응답은 40%'''로 집계됐다. 히로시마에서는 44%로, '용서할 수 없다'는 답보다 1% 포인트 높게 나타났고, 나가사키에서는 41%로 집계됐다. 또 히로시마(1945년 8월 6일)와 나가사키(1945년 8월 9일)에 원폭이 투하된 날짜를 아는지에 대한 물음에 제대로 답하지 못한 비율이 둘다 70% 정도에 달했다고 NHK는 전했다. 히로시마 피폭일을 아는 사람 비율은 30%, 나가사키 피폭일을 아는 사람은 26%였다. [[https://www.yna.co.kr/view/AKR20150803061500073|일본인 49% "美원폭투하 용서못해"…40% "부득이했다"]] 한편 일본 정부는 [[태평양 전쟁]] 패전 후 '원자폭탄 투하'와 관련해 미국에 '''단 한 차례 항의조차 하지 않았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01&aid=0001684340|<日, 종전 후 美에 원폭투하 항의 한 번 안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